나의 사랑도 그곳에 산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추억의 문은 견고하고, 우린 쉽게도 잊어버리는데. 이미 많은 비가 왔다, 지금도 충분히 어둡다.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올라 끝내 사라진다. 불러도 소용없다. 두려운 일들은 막상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다. 지쳐 쓰러지는 모습은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기껏해야 세상의 쓸쓸한 그림자일 뿐인 나의 흔들리고 어지러운 모습.그때 나의 눈은 어리고보이는 모든것은 너무 멀리 있었지혹은 삶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라고말할 수도 있어나의 사랑은 작고 얕은 샘물과 같아가뭄도 홍수도 쉽게 찾아왔지세상은 온통 넘치거나 모자란 것들그 속에서 쉽게도 지쳐갔어그대 마음의 갈피를 헤아리는 동안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고어쩔 줄 모르는 ..
우울하게도, 우린 결말없는 이야기를 참지 못했지. 행복하거나 또는 불행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아무 소용도 없었던 거야. 눈처럼 쌓인 세월은 두께를 이루었고, 거의 잊었다고 믿은 적도 있었어. 그러나 가장 낮은 곳에서 서서히 녹아내린 그 사소한 이야기는 저 혼자 깊은 물길이 되어 흘러갔지. 마지막까지 뒤돌아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라는 후회조차 이젠 무심하기만 해. 그래서 우린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못한 채, 결말지어졌지. 돌아가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끝이 나버렸지. 그 끝에서는 차디찬 눈과 같은 맛이 났어. 슬프도록 아무런 맛도 없었던거야.그 사랑이 어떠했냐고 먼 훗날 그대가 물으면 어떻게 할까. 눈물은 모두 바람에 말라버렸다고 대답할까. 그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눈물 때문에 ..
우리 이렇게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기고. 하늘에 별이 떴다 지고 땅 위에 꽃이 머물다 사라질 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가늠해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가늠해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아득하게 앙망할 때, 닿을 듯 닿지 않고 떨어질 듯 떨어질 수 없는 사이사이,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맞닿은 뿌리들이 문득 숨을 죽일 때, 그러다가 누군가 먼저 노래를 시작할 때. 나지막이 시작된 그 노래의 조용한 화음이 되려 하는 나는,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당신의 멜로디 근처를 맴돈다.당신이 '도' 라면 나는 높은 '미' 가 되어, 피와 살, 영혼과 육체가 어지러이 뒤섞인 울림으로,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음악을, 생의 아름다운 발..
당신이 찾아와서 내가 잠시 쉬어가는 처마 밑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크고 건강하고 하얀 두 날개를 가진 새니까요. 비가 그치면 푸르고 넓은 하늘로 날아가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처마 밑에서 비를 잠시나마 피하게 해 줄 수밖에 없어요. 밖은 아직도 폭우 중.그걸 잊게 할 수도 멈출 수도 없어요. 그냥 있을 뿐이에요.바람도 불고 천둥소리도 빗소리도 들릴 거예요. 그러니까 해가 뜨면 가도 괜찮아요. 창문을 열고 들어온들 그리 따뜻한 집이 아닐지도 몰라요. 온화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을지 몰라요.그러니까 날개가 마르면 가도 좋을 만큼 당신이 좋을 뿐이에요.
세월은 간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나이 때를 지나고부터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사람과 세상을 경험하면서 경계는 점점 흐릿해졌다내가 모르는 피와 뼈의 숱한 이야기가 의식 너머에서 산다.그래서 나에 대한 지리하고 반복적인 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녀를 생각하면 윤대녕의 산문집 의 책 표지에 적힌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갑자기 밤에 눈이 내려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부디 잘 버티며 생을 걸어 가다오'그렇게 좋은 계절에 태어난 나는 까마득히 오랜 기억에서부터 지금까지, 나이 마흔 여자가 모두 식당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우고 산다. 혹시라도 남편이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똑같다.새 길 없다. 생각해보면 어제도 갔던 길이다.다만, 이 생각이 처음이다.말하자면,피해가던 진실을 만났을 뿐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이..
눈을 감으면 어느새 그대의 얼굴이 나의 영상 속에 그려지고,내 상상의 화면 속에선 그대와 내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듭니다.상상의 세계 속에서 못할 것이 없지요. 언제나 그대와 내가 주인공이고 행복한 결말에 이릅니다.그 세계에선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만큼 사랑 받을 수 있고, 또 나는 호기롭게 나의 사랑을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언제나 슬픈 현실,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이라는 내 슬픈 영화. 사랑그대가 내개 보여주는 것은소리가 없는 풍경의심의 티끌도 불안의 빗방울도 닿지 않는 완벽한 세계 지상의 것이 아닌 슬픔과 또 기쁨으로 충만한 영혼 그리하여 나는입구도 출구도 없는 그곳에 갇혀사랑이라 불리는 잔인한 꿈속에 갇혀있다. 너를 보내고 난 뒤나는 낯선 풍경이 될 것임을 직감하..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라도 할 것도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것이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였고 .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다 찢어없앴고 .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소란, 박연준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내 운명 앞에서 어색하지 그지 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런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당신을 붙잡을 때도 있었지만 사실은 휘청거릴 때마다 우리는 손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그 때 당신과 내가 바래다 준 산은 엎어지지 않고 돌아눕지도 않고 강물에 담근 발목을 뒤척이며 잘 있더군요 시간의 진화옛날 시계 분침보다 시침이 더 길었다는 사실분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분침 따위 무시해도 좋은 잔챙이였다는 사실그런 분침이 지금 시침을 졸병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그렇게 사람들이 야금야금 시간을 다 파먹었다는 사실이대로 가다간 초침이 제일 길어질 날 올 거라는 사실 문상가긴 꼭 가야하는지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시려는지, 뒤를 한번 돌아봐 주면 안 되는지 물었습니다. 가는 길이 춥지는 않으신지, 그 말은 왜 끝내 안해주셨는지 물었습니다. 내일도 어제처럼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인지, 갈 때는..
잊고 지낸 줄로만 알았다들녘에 서면 재잘거리는 산 사람들무슨 이유로 언어의 외유를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들에게 동조하겠다는 배려 하나만으로 응했을 뿐인데항상 돌아서면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처럼가슴이 텅 비어있어한참을 걸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새 길을 만난다 충혈된 눈으로 아침을 열면또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아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려 보기도 하지만딱히 발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버스와 전철 인파틈새에서 뒤틀려 떨어진 것도 아닌데승강장 한편에 우두커니 서면자꾸만 무엇인가 잃고 방황하는 불구자로 서게 된다 나를 떠난 그 사람헌 절간이나 하나 차지하고서바깥세상계절이 바뀐 걸 알고나 있는지슬픈 언어를 남발할 수밖에 없었음이 예 있다불구인 몸을 이끌고 들녘 한가운데로 지날 때비로소 나래 접고 쉼을 얻는고추잠자리 한..
/소풍을 갔다 돌아오는데 배낭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찾을 길이 막막하여 걸음을 되돌리진 않았다. 집으로 오니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셨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배낭은 찾을 수 있다고, 어차피 중요한 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꿈에서 쫓겨나 있었다.하고싶은 말을 뒤집어보니하지말아야 할 말이더라가기싫은 길을 뒤집어보니덧없는 욕심이더라잊을 수 없는 사람을 뒤집어보니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더라너의 침묵을 뒤집어보니이별이 선명하더라휘영청 지구가 기울고 하루가 저물어갈 때날개도 없는 마음이 파닥인다.무거운 것들이 서로를 끌어당기..